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비평] 님포매니악 볼륨 1,2:

'뿌리내려 살아갈 자유', 글_ 김규민
님포매니악 볼륨 1,2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님포매니악 볼륨 1,2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님포매니악 볼륨 1,2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1.

  여느 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샐리그먼(스텔란 스카스다드)은 으슥한 골목 귀퉁이에서 피투성이의 여자 조(샬롯 갱스브르)를 발견한다. 악취가 진동하는 그녀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비장한 분위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조가 피투성이가 되기까지의 사건들, 그 단죄¹까지의 역사를 추적해가며 진행된다. 영화는 조의 외설적 연대기이다. 조는 찬찬히 자신이 저질러온 끔찍한 성의(죄악의) 역사를 되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편의 고백, 고해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고해가 매개되는 장소가 영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본다". 그녀의 해부된 신체를, 섹스를 본다. 다시 말해, 몸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훑는 렌즈를 통해 그녀는 파편화된 채 응시당하고 그녀 생의 모든 섹스가 들추어진다. 지루하리만치 많은 섹스들이. 이것은 분명한 관음이다. 우리는 카메라로 그녀의 기억을 관음한다. 그리고 관음이라는 형식은 현대 포르노그라피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즉, 조의 고해는 카메라를 경유하며 현대적 포르노그라피가 되는 것이다.  


영화정보는 하단에/ 모든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 영화
영화정보는 하단에/ 모든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 영화

  사실, 감독은 이미 이 영화에 대해 "포르노그라피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감독의 말이 맞다면, 이것은 고해이자 포르노그라피이다. 고해와 포르노그라피. 듣는 것과 보는 것. 영화에는 섹슈얼리티가 교류되는 고전적 방법과 현대적 방법이 함께 있다.² 이때 샐리그만은 "듣는 자"로서 관객을 대리해 그녀를 용서하거나 비난하고, 해독하거나 분석한다. 그는 신부이자 정신분석의이다. '신부-죄인', '의사-환자'라는 이 직선적인 거리는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녀를 죄 지은 여자이거나 주체화에 실패한 성인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이때 그녀의 섹슈얼리티- 지향성은 용서받거나 해방/치료되어야 할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녀가 구술하기를, 그녀의 죄는 "님포매니악"이 아니었다.³


  어찌되었든, 신부이자 의사를 자처한 샐리그만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나름대로 괜찮은 해석을 꺼내본다. "당신이 남자였더라도 같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우리는 샐리그만의 그럴듯한 정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의 지난 죄악들, 음탕하고 부도덕한 역사를 이해하려 해본다. 낙태나 성적 방종이라는 죄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너무 가혹하게 지워졌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샐리그만은 늘어진 성기를 만지며 조에게 다가간다. 그가 말한다. "이미 수천 번은 해봤잖아"
순간 영화는 암전 되고 방향을 알 수 없는 총성이 울린다.


¹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부도덕한 여자라 비난한다. 그러면서 마치 그에 대한 동의를 얻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²  푸코에 따르면, 기독교적 엄숙주의가 지배하던 중세에 섹슈얼리티의 담론장은 신부를 앞에 앉힌 고해성사실이었고, 정신분석학 기조가 들어선 근대로 와서는 정신분석의의 상담실이었다. 즉, 고해하고 고백하는 행위는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의 경험을 축적하고 교류하는 일이었다.
³  그녀가 말하길, 그녀의 죄는 “황혼이 조금 더 아름답길 바란 것”뿐이다.


2. 

  마지막 장면, 우리는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화면은 암전되어 더 이상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남게 되는 건 듣는 행위뿐인데, 조가 총구를 겨눈 상대는 바로 "듣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샐리그만- 그가 대리하는 암전된 화면 앞 관객- 고해성사실의 신부- 정신분석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조는 그들을 죽인다. 그리고는 외치는 것이다. 욕망할 자유를. 욕망하는 자신을 긍정할 자유를. 


  그러므로 이것은 현대적 양식을 빌려온 사드식의 정치적 포르노그래피⁴이다. 사드가 써온 대부분의 문제작들 역시 욕망으로 전개되다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자신의 소설 속 창녀들의 입을 통해 욕망이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역설한다.


 자, 덕이란 그저 환상일 뿐이야. 덕을 찬양한다는 건 영원히 자기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며, 기질에 따라 품게 되는 생각에 맞서 행하는 끝도 없는 반항에 불과해. 이런 마음의 움직임들이 자연스러울 수가 있나? 자연은 언제나 그렇게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지 않는가? 속지 말거라 덕성 있는 여자라는 말을 듣는 여자들을 믿지 마. 그런 여자들이 사용하는 것은 우리와 동일한 정념이 아니야.


   18세기의 계몽주의 활동가이자 자연주의자였던 그의 적은 모든 중세적 규율, 법 도덕, 권위였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전복하기 위한 소설에서 인물들은 마음껏 섹스하고 살인한다. 아래 사드 초기 소설 속 생탕쥬 부인의 말은 악마의 웃음을 띤 아이를 낳은 조에게 하는 말 같다.

아이를 죽이는 일을 두려워 말거라. 이를 죄라고 생각하는 건 환상일 뿐이야. 우리는 항상 우리 뱃속에 품는 것의 주인이다. 우리는 필요를 느낄 때에는 의약품을 가지고 어떤 것을 정화하는 것 이상으로 이런 물질을 어려움 없이 파괴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영화에서 조는 "죽이는 게 죽이지 않는 것보다 어려웠다"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소아성애자를 동정한다. 아무도 해치지 않은 그는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한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참고 속이며 지내야 했겠냐는 것이다. 사드와 마찬가지로 다소 과격해보이는 이 선언들의 본질은 결국 자유에 관한 것이다. 방종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권위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자유. 절벽에 매달린 나무처럼, 곧고 아름답지 않더라도 뿌리내려 살아갈 자유 말이다. 


  이처럼 감독은 21세기에 사드를 재현함으로써, 사드 이후 사장되었던 정치적 포르노그라피의 현대적 재생산을 모색한다. 오늘날의 포르노그라피는 무엇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단지 여성의 성을 해부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그칠 것인가? 혹은 탐미적 영상 실험으로 제 역할을 다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물음에 대해 영화가 이상적인 답변이라 칭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흥미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현대 포르노그라피가 할 수 있는 일들의 영역을 한층 확장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라스 폰 타니에의 <님포매니악>은, 분명 여태까지의 포르노그라피 영화와는 또 다른 지점에 와 있다. 



⁴  린 헌트에 따르면, 포르노그라피는 1790년대 이전까지(프랑스의 경우) 정치적 투쟁 도구로 이용되었다. 포르노그라피는 왕족 혹은 귀족의 권위를 조롱하고 위협하기 위해 쓰여진 포르노그라피는 전복적일만큼 노골적 성 묘사를 특징으로 했다. 19세기로 넘어감에 따라 포르노그라피는 점차 정치적 함의를 잃기 시작했고, 상업적인 하드코어로 전락하게 된다.  


글_   김규민



영화정보

<님포매니악> 
덴마크,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드라마/ 118min
감독  라스 폰 트리에
출연  샤를로뜨 갱스부르, 스텔란 스카스가드



Amor _아무 것도 모르면서. 우리들의 영화 잡지

Amor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