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RE-LIGHT MOVIE] '결혼은 미친 짓이다'

사랑하면 다 결혼하니? _ 글 김효정
감독 유하/ 출연 감우성, 엄정화 (2002)
감독 유하/ 출연 감우성, 엄정화 (2002)

(글의 구성ㅡ만남-데이트-신혼여행-파국ㅡ은 실제 영화의 구성과 동일하며
영화 스토리상 이번 호는 에세이 형식을 취해 집필하였습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한 편의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나는 실패로 종지부를 찍은 몇 번의 연애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한 살, 군대 간 첫사랑에게 차였다.
스물 둘, "네가 여자로 안 보인다"는 말을 듣고 차였다.
그리고 스물 셋, 그가 "나쁜 년"이라는 말을 남기고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만난 B. 
이 이야기는 영화 이야기를 빙자한 나의 기록이다.


1. 만남

  B를 처음 만난 건 찬바람이 살을 에던 작년 1월의 끝자락, 여수의 한 커피숍에서였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준영(감우성)과 연희(엄정화)는 첫 만남에서 증명사진에서나 볼 법한 미소로 36번 째, 혹은 37번 째 맞선 상대처럼 시시하게 굴었지만 B와의 첫 만남은 영화와는 다르게 발칙한 구석이 있었다. 우리는 얼굴, 나이, 학력, 직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채로 '몇 시에 어디서 만납시다'해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글 쓰는 사람이니 미남 미녀는 아닐 거라 일찌감치 맘 접은 것도 아마 한몫했지 싶은데, 만나서도 저 질문들은 일절 하지 않았다. 사람이 궁금한 게 아니라 오로지 서로가 쓰는 '글'이 궁금했다. 

  처음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지방에선 느껴보지 못한 그 부드럽고 유려한 말솜씨가 참 좋아서 녹음해놓고 두고두고 듣고 싶을 정도였다. "효정 씨"하고 부르는 순간 밀어서 잠금 해제되는 기분이었달까.

  그는 지방 출장 차 여수에 들른,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서울의 한 대기업 사원이었다. 뭐든지 액셀로 정리해야 하는 그의 계획에 포장마차는 없었지만 우리는 2차까지 가서 잔뜩 마시고 취했다. 그리고 글 쓰는 데서 오는 고독함과 괴로움을 토로하던 자리는 차츰 사적이고 섬세한 이야기로 이어져 열두 시를 넘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줄다리기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을 더 붙잡고 싶은 마음과 내일이면 잊힐 설렘일 뿐이라는 생각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나는 "잘 지내요" 인사한 뒤 뒤돌아보지 않았고 B는 잡지 않았는데, 얼마쯤 갔을까. 택시에 올라타 선잠이 들 때 쯤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다시 여기로 올 수 있어요?


  순간, 서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줄이 툭, 끊어졌다. 


2. 데이트

  두 번째 만난 곳은 서울, H동의 한 음식점이었다. 매콤한 커리를 먹다가 "인도의 커리 맛은 어떨까요?" 물었다.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B의 입안으로 콩이 들어갈 때쯤 말했다. "너무나 보고싶었다"고. 

  한 번 놓아버린 줄을 다시 잡아 줄다리기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리운 마음은 참을 수 있었지만 연희처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없는 처지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졌다. 준영처럼 연애도, 결혼도 싫다는 B에게 그 어떤 것을 요구하기는커녕 베풀 수조차 없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할 자신도, 누군가를 책임질 용기도 없다는 B에게 좀 전의 입맞춤은 뭐냐며 따져 묻거나 책임감을 가지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자라나는 욕심을 잘라내는 지난한 과정일지라도 나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연애든 결혼이든 포기해야 한다면 포기할 작정이었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안한 사랑일지라도.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가 내쉬는 큰 한숨소리마저도 좋았다. 지하철 창가에 언뜻언뜻 비치는 얼굴이, 대충 동여맨 스니커즈의 신발끈이,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샐러드 몇 접시를 비우는 모습이 좋았다. 호탕한 웃음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만나는 매 순간이 꿈결 같았다.  


3. 선택, 신혼여행

  하지만 틀림없이 불공평했다. B는 언제든 나를 떠나 누구라도 만날 수 있었다.
준영처럼 단 한순간의 안도도 주지 못한 사람이었고, 애초에 가만히 내 곁에 머무른 적이 없었으므로 "소개팅을 하게 됐다"는 B의 말에 토를 달 수조차 없었다. 소개팅에 나올 그 여자가 엉망진창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때로는 '이제 그만 만나자'는 말 없이도 이별은 가능한 거였다. 4월에 떠난 섬은 우리의 이별여행이자 신혼여행이었다. 평소 동경하던 소설가를 만나는 자리였다.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꽃을 밟으며 등대에 올라 내려다본 바다는 아름다웠고,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거뭇한 턱수염을 훑고 지나갔다. 휘파람새의 울음소리를 따라하며 거닐었던 바닷가와 낚싯대로 통통한 전갱이 몇 마리를 낚고 환하게 웃던 개구쟁이 같던 그의 모습. 사랑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변질되는 사랑을 노력으로 막아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손을 잡았다. 입을 맞췄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붙잡지 못한대도 상관없었다. 시작은 속수무책이었으나 끝은 우리의 선택이었으므로 어쩌면 시작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별일지도 몰랐다. B는 그렇게 내일 볼 사람처럼 덤덤히 떠났다. 


4. 1년 뒤, 파국

  그 후로 1년 뒤, 4월 마지막 주에 B는 결혼식을 올렸다. 
제발 엉망이기를 바랐던 소개팅에서 만난 아가씨가 가혹하게도 운명의 상대였던 건지 그 처자와 백년가약을 맺는단다. '사랑은 지랄이고 결혼은 무덤'이라고 했던 B가 "이렇게까지 해서 결혼이라는 거 해야 하나?" 푸념하다가도, "근데 그런 게 다 결혼에 필요한 거더라"하는 풋풋한 신랑이 된 것이다. 그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B의 신부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소개팅을 말려야 했던 걸까? 결혼한 연희를 잊지 못하는 준영처럼, 그를 붙잡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까?

  사랑은 떠나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1년 만에 B를 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B와는 다르게 공식적인 '연인' 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사랑이 원래 이렇게 우스운 건지 B가 결혼 소식을 통보했을 때 나는 마침 지금 연인과의 결혼을 포기한 상태였다. 결혼은 사랑과는 또다른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여느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나도 막연히 그와의 결혼생활을 꿈꿔본 적이 있긴 했다. 아니,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와 일상을 함께 한다면 전쟁같은 삶이 어느 정도 견딜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삶에 부딪칠수록 살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버릴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버린 것 같은데 세상이 또 무언가를 버리라고 요구하니 나로서는 또 버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결혼을 버렸다. 연희처럼 사랑만큼이나 경제적인 요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연애를 할 때마다 족족 말아먹으면서 (뒤늦게서야) 깨달은 것이기도 한데, 준영의 말마따나 한 사람만을 사랑하며 그 수많은 책임과 의무를 떠안을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나는 여태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어지러운 삶 앞에서 가장 먼저 버린 것이 우습게도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제서야 알았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연인' 안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랑이 '결혼'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영화나 음악의 알맹이가 '이야기'이듯, 연인관계와 결혼도 알맹이는 '사랑'이다. 이야기는 이야기에 그칠 수 있다. 사랑도 가슴 속에서 타오르다 일순간 꺼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 정석은 없으니 거짓이라 폄하할 수도 없다.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나도 B처럼 때가 되면 결혼할 수 있을까. 지금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슴이 쿵쾅거리다 못해 터질 것처럼 뜨거웠던 B와의 사랑에 비해 편안하고 은은한 지금의 사랑이 결코 가벼워 결혼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결혼하지 않겠노라 호언장담하지만 언젠가 내 지나간 연인 아무개에게 청첩장을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 나중에 "결혼은 미친 짓이야!"라며 B가 뜯어말리진 않을까.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B의 결혼을 축하하며.


글_ 김효정

Amor _아무 것도 모르면서. 우리들의 영화 잡지

Amor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