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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오멸 감독 인터뷰

독립영화의 '별'님을 만나다_ INTERVIEWER 김규민
독립영화의 '별'님을 만나다

전북독립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8일. 디지털 독립영화관 어귀 카페에서 우리는 '독립영화의 별' 오멸 감독을 만났다.
희끗희끗한 머리와는 방대로, 아이처럼 반짝 빛나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겐 늙음과 젊음이-순수화 지혜가- 열정과 혹독함이 함께 베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오래간 그 시간을 곱씹었다. 그리곤 이름을 '멸'로 바꿔야겠다는 우스운 다짐이 들었다.


INTERVIEWER 김규멸


chapter.1 오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왼쪽부터 <뽕똘, 2009>, <어이그 저 귓것, 2009>왼쪽부터 <뽕똘, 2009>, <어이그 저 귓것, 2009>
왼쪽부터 <뽕똘, 2009>, <어이그 저 귓것, 2009>


오멸의 영화 지형은 굉장히 특이하다. <뽕똘>, <어이그 저 귓것> 등 유쾌하고 소소한 영화와 동시에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이나 <이어도>같은 실험적이고 어두운 주제의 영화가 한 감독의 필모 안에 공존한다. 이건 좀 특이한 일 같은데.

 

오멸 (이하 오) 우선 영화 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나의 영화를 두 가지 톤으로 구분해. 하나는 <뽕똘>과 <어이그 저 귓것>으로 이어지는 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슬>, <이어도>의 그것이야. 나는 어떤 때는 영화로 놀고 싶고, 어떤 때는 진지하고 싶어. 내가 한 가지 성향만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거든. 

내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다룰 것이냐에 따라서 그 방식(형식, 톤)을 찾아가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나의 영화를 두 가지 톤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그 형식들을 쪼개놓기 때문인데, 내게 형식이란 대상 속에서 발견하는 것. 나는 형식을 배워본 적이 없어. 비전공자에다가 단지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시작했잖아.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에 따라서 항상 톤이 바뀔 수밖에 없어. 그건 대상 속에 있는 거니까. <뽕똘>을 찍을 때는 그 형태가 맞고, <지슬>은 그 형태가 맞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 영화가 각 스타일의 양극처럼 구분되고 있지만, 실은 나는 두 가지 지형을 가진 게 아니야. 나는 지형이 없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거야. 계속 다른 형식,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찍어가려고 노력해. 했던 스타일을 또 하는 건 재미없잖아. 계속 다른 톤을 찾아가고 싶은데, 그 찾는 일이 힘든 거지. 나는 영화를 통해 성장하고 싶고 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방식을 답습하는 건 싫어. 그래서 고생하고 있어(웃음). <지슬> 이후에 관객들이 기대하는 만큼 안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계속 공부하는 중이거든. 


왼쪽부터 <이어도, 2011>,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2012>왼쪽부터 <이어도, 2011>,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2012>
왼쪽부터 <이어도, 2011>,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2012>


뭔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걸까?


나 스스로하고 약속했어. '10년은 영화를 공부하자'라고. 내가 미술 공부를 10년 했거든. 미술을 하다가, 공동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연극으로 넘어와 연극도 10년을 했고. 연극을 10년 공부하니까, 욕심이 생겨서 영화라는 종합예술이 너무 하고 싶어지더라. 그러니까 영화도 10년 동안을 공부하고 배우면서 쌓아야지라는 다짐을 하면서 시작한 거야. 지금 8년 차인데, 너무 힘들어 죽겠어(웃음). <지슬> 이후에 엄청 빡세게 공부하는 중이야. 언젠가 전병원 국장에게 힘들다는 하소연을 했거든. 근데 그가 하는 말이 "10편은 찍어 봐야 뭐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게 맞는 말이야. 아직이야 나는. 남아있어. 지금 찍은 작업들이 누군가에겐 결과물이지만, 내게는 과정 중의 하나인 거지.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그 공부에 대한 동기가 조금 변한 게, 나의 성장을 위해서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쌓아온 것들을 후배들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작품마다 시스템도 다 틀렸거든. 그러니까 더 철저하게 체험해보자, 다양하게 해봐야 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 공부도 공부고 그 경험들이 데이터가 되었으면 해서.


그럼 더이상 <자파리>같은 영화는 볼 수 없을까? 자파리로서 놀이, 유희로서 영화를 바라보던 시간은 지나간 것? 


그건 아냐. 나는 공부가 즐거워야 해. 영화가 재미없었으면 하지 않았어. 돈 때문에 그렇게 힘든데도, 찍는 게 즐거워서. 그래서 현장도 즐거웠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이야기도. 

그런데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단어는 그 안에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고 봐. 고통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웃고 즐기는 것만이 놀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천상병 시인이 말한 대로 '여기는 소풍 온 세계'이다. 삶의 모든 고뇌와 아픔까지 통틀어 '소풍'이라고. 조금 무거운 소풍 길이지만(웃음).

얼마 전에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제작비를 못 구하는 상황들이 있었어. 그래도 작업을 해나가는 이 순간이 정말 즐겁더라. 그러다보니 드는 생각이 "체질 개선하자". (웃음) 내가 이제 나이가 47이 되면서 인정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져. 체력, 흰머리 그런 것들. 그동안 이런 것들이 작업을 좌절시키거나 주저하게 만들지 않나,란 생각을 했어. 그래서 최근에 산티아고 400킬로를 걸었다. 목표는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계속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었어. 그 동안 딱 장편 하나, 단편 하나를 썼다. 

산티아고에서는 최소한으로 생활했어. 나 산티아고 갈 때 대학생 남자애를 데리고 갔거든. 걔랑 같이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딱 60만원을 썼어. 지금 들어도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하루에 20킬로씩 걸으면서 밤에 글을 쓴다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또래 친구들한테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아무도 안 가려고 하더라(웃음).

그런데 산을 넘는 길이 곧 예술을 하는 일 같더라. 내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앞으로 더 높은 언덕을 높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더 긴 언덕을 지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결국 스스로 묻고 답하는 그 고난한 과정 역시 나를 성장시키는 일이고, 나로 인해서 한 사람이라도 그의 정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힘든 일도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2012><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2012>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2012>


갑자기,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연극에서 영화로 넘어오게 되었나. 


실은, 나는 영화를 안 해도 되는 지점에 있었어. 우리 극단이 정말 잘 나갔거든!(웃음) 일본에서 우리 극단 지부도 만들어줬고, 부산에서 상 받기 전에 청소년 아시아태평양 연극제에서 4관왕도 했어. 정말 제일 잘 나갈 때쯤, 금전적 여유가 생기니 그 돈으로 영화를 찍자, 하고 시작한 거야. 왜냐면 내 꿈이 4층짜리 사설 아트 센터를 세우는 거였는데 연극으로는 그 돈이 안 벌렸거든. 여러모로 극단 멤버들에게 생활의 (금전적) 여건들을 마련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연극으로는 내 비전을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거지. 서른 중반에 그런 문제(극단 단원들의 생계) 때문에 고민이 엄청 많았는데, 이것 저것 해보던 것 중 하나가 영화라는 장르였던 거야. 

그때부터 연극을 한 돈으로 영화를 만들어 갔는데, <지슬> 이후로는 경제적 조건이 어려워져서 영화를 만들기가 힘들어졌어. 그때 정말 화가 났었어. 영화라는 장르에. 그 장르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과, 또 한편으로는 문화를 대하는 이 나라의 태도에.

나는 미술도 연극도 축제도 정말 열심히 했어. 인정받기도 했고. 그런데 단 한 번도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어. 그 누구에게도 우리의 예술 세계에 대해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지슬>이 상을 받으니 모든 언론에서 연락이 오더라. 이게 얼마나 불균등한 예술을 대하는 태도냐. 연극하고 미술하는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치열하게 그 사람들은 살고 있는데. 이제 그분들이 보기에 내가 잘 나가는 사람이 된 거야. 말도 안 되는 역전이 일어난 거지. 정말 화가 났어. 연극으로는 건물을 세울 수 없다는 게, 먹고 살 수 없다는 게. 


근데 영화로 건물을 세운다는 야망과 지금 하시는 작업들은 조금 괴리가 있다. 


사실 첫 작품 찍자마자 상업 시나리오가 들어왔었어. 그런데 안 한다 그랬어. 건물을 세운다는 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애초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이루기 전까지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바운더리의 것들을 다 체험하고 싶어해. 물론 돈은 어느 순간에는 벌어야겠지만, 그 체험을 그들과 함께 지나오지 못하면, 나중에 그 돈을 벌더라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잖아. 무엇에 필요한 돈인지를 모르는데. 좀 더 나은 여건이 되었을 때 무얼 채워야 할지 알 수 있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chapter.2  타자를 바라보는 예술



존경스러운 태도이다. 힘든 일일 텐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가?


그러게. 나도 나에게 질문을 해. 왜 이걸 꼭 네가 하느냐고. 나의 대답은 '인식하는 자가 해야한다'야. 조금이라도 인식한 자가 하지 않으면 사회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내 열악했던 환경은 내게 굉장한 중요한 현실이었어. 내가 영화를 시작할 당시에 제주도에서 영화를 찍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거든. 지금까지도 내가 지역 영화의 1세대야. 처음, 친한 형님과 작업하던 그 시기가 정말 힘들었지. 미술이나 연극도 마찬가지였고. 여러 가지 한계 속에서 컸어. 스승도 없이.

한 번은, 더 좋은 환경에서 작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어. 20대 중반쯤이었는데, 당시 한 선배가 내게 독일 유학을 제안했었던 거야. 그곳에는 선생님도 있고 한국 - 제주도 보다는 예술을 하기 안락한 환경이 아니겠냐고. 그런데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같은 공기를 먹고, 같은 공간과 시간을 살지 않는데, 이웃들에게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예술을 할 수 있겠냐 싶었던 거지. 내가 예술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곁에 사는 사람들이 즐거웠으면 하는 거거든. 이들 삶의 부재가 무엇인지 알고 위로하는 일. 

이러한 작업을 먼 시간으로 본다면, 이 자리가 분명히 고되거든. 스승도 없고, 배울 방법도 없고. 힘든 숙제야.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는 예술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이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살아야만 이들도 내게 마음을 내어준다고 생각했지. <지슬>은 그게 인정받은 계기였던 것 같아. 그들이 나를 제주 감독으로 이야기해주는. 시간이 오래 걸렸어. 근 이십 년이. 이제는 제주도 할머니, 할아버지분들이 4.3사건을 영화로 기록한 것에 대해 고맙다고 해주셔. 이런 것들이 미술, 연극을 할 때는 생기지 않았던 파장들이야. 


<지슬>
<지슬>


언제부터인가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개인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작업들이 계속해 이어진다. 이러한 주제는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중학교 때까지 운동을 계속했어. 아버지도 태권도 사범님이고.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거든. 공부는 하나도 안 했지. 그러다 보니 대학을 들어가기가 힘들더라. 그래서 평소 만화책을 좋아하기도 해서 입시를 앞두고 미대를 준비했는데 실기를 잘 봐서 합격하게 된 거야. 

미술을 하던 그때는 지금처럼 사회성도 없었고, 인성이 훌륭하지도 않았고. 세상에 관심도 없이 내 감정만 중요했어. 내가 어떻게 마음이 편안할지, 스스로의 자유가 가장 중요했던 거야. 자유는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지, 그게 내 20대 내내 가장 주요한 화두였어. 그러다보니 모든 게 불만이었지. 살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그림도 포기하고, 약을 먹었던 적도. 그런데 그때 뽕똘이 찾아온 거야. 

<눈꺼풀, 2015><눈꺼풀, 2015>
<눈꺼풀, 2015>

그 뒤로 팀을 만들기 시작했어. 이 팀들이 거리공연에서 시작해 연극도 축제도 만들었어. 결국, 지난 10년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면, 팀을 만들고 10년을 타인을 바라보는 작업이었지. 어떻게 해야 타인과 어우러질까. 그렇게 같이 노는 작업을 10년 하니까 또 다른 창작에 대한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고, 영화를 시작하게 된 거야. 

4.3을 이야기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내가 기획한 축제 프로그램에서 만난 어느 사람 때문이었어. 예술가 최상돈이라는 사람인데, 4.3의 기억을 노래하는 가수야. 그가 4.3사건을 알게 해주고 역사 공부를 시켜 주었어. 따로 찾아가 배운 게 아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찾아온 거지. 예술이라는 장르의 혜택을 받은 거나 다름없어.

그 삶을 지나오니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 대해, 이웃에 대해, 내 뿌리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작품에 녹아든 거야. 이걸 해야지, 해서 공부한 적은 없었어. <눈꺼풀>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그 이전은 제주도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었어. 한국이 내게 뭘 해주었는지도 모르겠고, 제주밖에는 관심이 없었어.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내가 가슴이 아프구나,를 깨달은 거야. 이건 결국 난 저들과 함께 묶여있던 거야. 저들의 통증이 내게 고스란히 오는구나,라고 느낀 거지. 그들 역시 내가 예술가로서 어루만져야 하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었구나. 제주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작업들은 단순한 제의,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같은 땅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구나.


그런 셈이지. 하지만 그게 의도된 건 아니야. 매 순간 순서 없이 다가오는 그런 느낌, 감정, 순간의 것들로 이야기를 해나갔을 뿐이지. 그중 이어도는 또 다른 동기로 만들어졌어. 4.3이라는 문제를 다룬다기보다는 나의 선배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의 작업이 무엇일까? 그걸 나의 손을 통해 받아온다는- 47년도를 들여다본다는 느낌으로 시작한 작업이야. 이 땅에서 영화를 했던 선배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했어야만 할까 고민하다 보니 <이어도>가 탄생했어. 그래서 내게 이어도는 감상이 조금 달라. 이건 많이 보이고 설명되어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 도서관 어딘가에 먼지 쌓인 채 놓여 있었으면 해. 


<이어도, 2011>
<이어도, 2011>


하고 싶은 대로. 그때 그때 느끼고 인지한 것들을 찍는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자유를 "독립"으로 부르는 걸까? 감독이 생각하는 독립영화는 무엇인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독립영화가 자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절대 그렇지 않아. 절대! 오히려 자본의 구속이 더 심하지. 상업이 더 자유로워. 자본을 통해 환경이 더 편해지잖아.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런 시도들을 만들어주고. 

독립영화가 자본으로부터 자유라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나는 반대로 독립영화 현장이야말로 가장 힘든 형태로 자본에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자유나 독립은 열악함 속에서도 창의성을 내보이는 것, 열악함 그 자체를 즐기는 그런 거야. 그러니까, 독립영화라는 것은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인 거지.

<뽕똘>이라는 영화가 그런 정신으로 만들어진 영화야. 배를 섭외할 돈이 없어서 배를 그냥 만들었어! 배를 만들라고 하니까 스텝들이 놀라더라. "어떻게요?" "가서 저거 주워와라." 이렇게 만든 거야. "돗돔은 어떻게 합니까 감독님" "주워와라" (웃음) <뽕똘>은 시나리오에서는 평범하고 무난한 영화였어. 그러나 그게 영화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특별해진 거야. 돈이 있으면 시나리오를 그대로 찍을 수 있었겠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나오는 그림대로. 배가 나오고, 돔이 나오고. 그러나 그 열악함이 되려 내겐 기회였던 거야. 새롭고 유쾌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떤. <뽕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야. 



<뽕똘><뽕똘>
<뽕똘>



chapter.3  독립영화를 묻다



이번 전독제에서 활동하면서 출품된 모든 영화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문득 "독립 영화"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디서 본 듯한 장르적 느낌이 물씬 나도 독립영화이고, 많은 제작 지원을 받아 엄청난 때깔을 자랑하는 영화도 독립 영화이다. 감독님께 여쭙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독립영화에 대한 규범적 기준이랄까, 꼰대스러운 말일 수도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건 규칙화하기 때문이야. '독립'이란 단어를 누가 만들어 버렸어. 하나의 규범이 있는 것처럼. 자유롭지 못한 방식으로 제한해버리는. 특히 독립영화인 내부에서 더 그래. 그런데 이건 예술이야. 돈 많이 들어간 예술도 있잖아. 때깔이 좋으면 규칙을 어겼다고 생각해. 스스로들이 아량을 넓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미술이 퍼포먼스를 시작했다고 그게 미술이 아닌 건 아니잖아. 그거 다 옛날 얘기지. 예술의 영역을 가지고 따지고...... 우리는 지금도 그 단어 안에 허덕인다고 생각해. 독립영화의 폭은 그것보다 넓어야 해. 독립영화를 독립영화로 만드는 건 (탈자본이네 형식이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제작 방식을 답게 하고 있느냐? 라는 거지. 

환경에 자신들을 가두는 것. 환경에 지면서 작업을 하는 게 싫어. 돈에 지고. 독립영화라는 건 결국 내 중심을 가지고 싶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스케쥴링을 할 때, 보통 이틀이야. 시나리오는 몇 개월을 써놓고도, 찍을 때 되면 쫓겨서 몰아 찍는 거야. 글은 페이퍼에서 지가하지만, 시나리오는 그게 끝이 아니거든. 그런데 그 과정을 시간에만 쫓겨 "찍기만" 하는 거야. 나의 텍스트를 창의성 있게 재해석할 수도 없고. 앵글을 돌리는 그 시간이 가장 감각이 예민해지는 시간인데, 그 순간을 오래 음미하지 못해. 나는 그래서 스텝들에게 부탁해. 나를 여유롭게 해줘라. 좋은 생각들, 고민할 수 있게 해줘라. 내가 현장에 밀려서 가기 싫어해. 그런데 우리나라 독립 현장은 상업보다도 더 현장에 밀려서 찍어. 그게 독립인가? 왜 독립 현장까지도 상업 씬의 논리로 이어지는 거지? 열정페이라고 비난하는 거는 자본가들에게 해야 할 일이야. 안 그래도 열악한 이 환경에 상업 씬의 논리들- 절차들이 끼어버리면 영화는 돈 있는 놈들만, 그게 준비된 놈들만 찍는 게 되어버린다고. 독립영화라는 게 감독이 자기 모든 걸 털어서 하는 일이 되어버리면 오히려 불균등하지 않나. 스텝들과 배우들과 같이 포트폴리오는 만들어가는 건데, 누구는 빈털터리가 되고 누구는 돈을 받아가. 감독은 그래서 한 영화 찍으면 다음 영화를 못 찍게 돼. 영화라는 작업이 이래서 무슨 공동체 작업이야? 서로 이해하고 상생하는 구조가 되어야 할 거 아냐. 조금만 나눠주면,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서로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는 영화라는 건 그저 시스템이지. 스스로 영화인이라고 말할 수 없어. 그건 노동자야. 이 이야기를 하면 미움받을 거야. 현재의 영화관에서. 

그래서 나는 언젠가 돈을 정말 많이 벌면, 독립영화 제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장비를 빌려주고 싶어. 그 환경을 넉넉하게 마련해주고 싶은 거야. 대신 조건은 정말 하고 싶은 걸 해라. 아르바이트하느라 시간 뺏기지 않고, 네가 자유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해라. 이런 것들을 누군가는 실현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독립영화인들의 플랫폼을 마련한다거나 하는 일들 있잖아. 단어에 함몰된 것도 있지만, 독립영화인들이 처한 현실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이 없으니까 그 의미가 자꾸 탁해지는 것 같아. 중요한 건 자기 색을 갖는 거거든. 독립영화는 생각보다 그 폭이 넓어. 팀 버튼도 독립영화 감독이라고 생각해.


감독님께는 유대 깊은 팀이 있기 때문에 더욱이 그런 "독립영화 정신"이라는 게 가능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사실 힘든 일이다.


환경이 그걸 만들어준 거지. 나는 환경에서 대안을 찾아. 절대 내 현장이 모든 순간이 즐거울 수는 없어. 촬영 현장에서는 긴장감과 치열함이 있어야지. 그러나 그 앞뒤 시간은 삶이야. 삶의 시간도 영화 현장 안에 있다고 봐. 그러니까 (그 시간을) 즐겁게 행복하게 보내야해. 

내가 어떤 환경과 싸우느냐가 그 영화의 질감으로 고스란히 드러나야 해.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면 그 영화는 평이해져. 나는 원고지에 쓰인 글을 글로 안 보고 그림으로 봐. 무슨 말이냐면, 원고지에 글을 쓰고 지우고, 또다시 쓰고 지우는 그동안에 그 흔적을 본다는 거야. 이 과정이 내용보다 나를 감동시켜. 그럼 나는 이 글 안 읽어도 돼. 한 작품 안에 실패가 맴도는 작품, 실패를 같이 이야기하는 작품이 좋은 거야.  결과물 안에 실패가 공존해 있을 때 나는 되게 좋은 작품이 나왔구나 생각해. 



<뽕똘>
<뽕똘>


조금 샌 이야기인데, 정말 매력적이던 <뽕똘> 그 여배우의 근황이 궁금하다.


걔 네 조카야. 걔는 중3 때부터 가출해서 나한테 두들겨 맞았어. 나중에 학교를 때려치우더라고. 그래서 연극을 시켰어. (웃음) 내가 무서워서 계속 연극 하다가 결국 3~4년 뒤에 극단 메인 배우가 되었지. 아까 말한 4관왕 할 때 걔가 배우상 탔어. 요즘에는 내가 놔줬는데, 지금 제주도에서 촬영하는 영화들 조감독도 하고, 무대 연출도 해. 자기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들로 잘 먹고 살어. '하고 싶을 때까지 해라'라고 말해줬어.


감독님 이후로 요즘 제주에서의 영화 작업들은?


요즘에는 전보다 활발하지. 그런데 나는 거기 가서 그들 선생이 되어 주고 싶진 않아. 그것도 내 숙제이긴 한데, 지금은 아직이야. 내가 아직 더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로컬의 선두니까 내가 더 가보고 싶어. 그게 지역에서 영화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더 좋은 참조일 거야. 아카데미를 만들자 하는 제안이 있긴 했었지... 어쨌거나 내가 지금 영향이 되어, 지역에 영화와 관련된 예산이 생기고 동기를 얻은 이들이 있다면 이미 충분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파미르>
<파미르>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다. 갈무리 질문 전에, 근황에 대해 물어야 하지 않겠나(웃음). 최근 몽골 작업(단편<파미르>)은 어떻게 시작한 것인지?


나는 파미르를 뜬금없이 사진으로 한 장 보고 그 사진에 매료됐어. 첫 느낌이 '삭막하고, 황망하고 그럼에도 너무나 고독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어. 살아서 본 사진 중에서 가장 처절하게 아름다운 사진이라고. 우주 같은 장소였어.  

내게 그곳은 무슨 세계의 지붕과 같은 수사가 아니야. 그 한 컷의 사진으로 내 영혼이 그곳에 가고 싶어 미치는 장소가 됐어. 내 속에 고독이나 아름다움이 있다면 난 그것을 파미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 매혹적인 공간으로 아이들을 보내신 이유는?


그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 생각을 해. 그래서 정말 아름다운 곳에 보내고 싶었어. 내가 살아서 그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파미르가 아닐까. 그 고독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공간. 


아름답다. 본방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정말 마지막으로 전독제 홍보차, 그 전반에 대한 소감 들으며 인터뷰 마치겠다. (웃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제. 웬만한 영화제는 다 가보았는데, 그 중에 제일 좋아. 왜 좋았는지 말로 다 설명하기에 애매해. 이곳의 사람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부터, 영화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 영화제가 화려하지도 자본이 많이 들지도 않는데, 그런 열정과 마음으로 이걸 꾸려나가고 있다는 게 와닿아.

안쓰러운 게, 많은 영화들은 영화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과 만나지 못 해. <지슬>도 우리가 돈 모아서 상영한 거거든. 그렇게 해도 누가 보러 오지도 않아. 잘 알지도 못하는 감독 영화를 누가 보러 와주겠어. 그런데, 여기는 경쟁에서 떨어진 작품들도 모아서 상영을 해주고, 이야기의 장에 끼게 해줘. 모든 사람을 아끼지 않으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지도 않지. 잘하는 사람에게만 박수쳐주는 세상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공간을 만들어주려고 해. 그들이 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끔 해주는.

그리고 전독제는 영화제면서 사회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이야기하는 영화제야. 유일하게 여전히 세월호를 추모하는 영화제거든. 참 많은 예술가들이 시대상을 담는 것으로부터 피해있어. 더욱이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할 때인데. 그런 점에서 영화제가 감독보다 낫다. 예술가보다 나은 영화제야. 그렇게 생각해. 


인터뷰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더 고맙지. 



[끝]


Amor _아무 것도 모르면서. 우리들의 영화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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