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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연재]『속죄』와 《어톤먼트》에 관하여_ 김지섭

속죄와 어톤먼트

― 이언 매큐언의 『속죄』와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에 관하여


그림 강재필
그림 강재필

아주 오래 쓴 편지에 관하여

  사법적 절차에 관하여, 어쩌면 우리는 더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죄를 짓고 그에 따른 벌을 받는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그러나 이게 속죄일까? 사람이 죽인 사람을 사형에 처해졌다고 해서 그를 용서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죽음이 살인자의 속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용서는 처벌과 무관한 개념이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권리
이며 지난한 과정이다.

용서와 편지의 공통점은 둘 다 일대일의 구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뿐이며, 편지는 언제나 유일한 독자를 두고 쓰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죄의 주인이듯이, 편지의 주인은 편지를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일 것이다. 세실리아는 로비에게서 받은 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겼을 때 이렇게 소리쳤다. “그 편지는 나한테 온 거야. 아무도 읽을 권리 없어!”

하지만 그녀의 편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로비의 편지는 강간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다. 편지는 외설적이었고, 목격자였던 소녀는 확신에 차서 그를 가해자로 지목한다. 그렇게 로비는 감옥에 갇힌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에게는 감옥에 남을 건지 전쟁터로 나갈 것인지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전쟁터로 떠난 그는 결국 그곳에서 죽는다. 로비를 기다리던 세실리아 역시 피신해 있던 지하도에서 사고로 죽고 만다.

편지의 주인들은 그렇게 죽었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날 브리오니는 자신의 증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지만,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 대상이 사라진 속죄는 보낼 곳 없는 편지와 같다.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자 이제 그녀의 죄만 남는다. 이것은 분명한 불균형이다. 두 사람의 부재가 증명하는 것은, 더 이상 속죄할 필요가 없음이 아니라 영원히 속죄해야 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다뤄지는 장면 중에 소녀(브리오니)가 강물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브리오니는 로비를 돌아보며 묻는다.

“내가 강물에 빠지면, 구해줄 거예요?" “물론이지.” 브리오니는 정말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놀란 로비가 달려들어 소녀를 건져올린다.“왜 날 구해줬으면 했는지 알아요?" “아니." “정말 몰라요?" “정말 몰라.”  “내가 오빠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이 알게 되는 건 브리오니가 실은 로비를 사랑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런데 소설은 좀 더 파고든다. 로비는 문득 이때를 떠올리며 브리오니가 자신을 사랑했기에 그런 일을 벌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어 이렇게 서술된다.


 “그 충동, 일시적인 악의, 사춘기 소녀의 파괴적인 감정, 이런 것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은, 그애가 품은 악의가 끝까지 거짓 주장을 고수하여 마침내 그를 완즈워스 감옥으로 보낼만큼 그렇게 큰 것이었나 하는 점이었다.

(....) 물론 그 당시에 브리오니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그애를 용서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애에게 진 빚을 두고두고 되갚
아줄 수 있는 길이니까.”(329-330쪽)


어톤먼트<Atonement> 2007作 드라마, 로맨스/영국
어톤먼트 2007作 드라마, 로맨스/영국

  사실 로비가 얼마큼의 증오를 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이야기의 끝에서 독자와 관객이 마주하는 건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결국 브리오니가 쓴 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브리오니는 그들의 이야기를 59년 동안 썼다. 그렇다면 로비의 저 증오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말하자면 로비가 증오한 브리오니는, 브리오니가 로비가 되어 증오하는 브리오니 자신이었다. 속죄의 대상을 잃은 편지가 향한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글쓰기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녀는 속죄하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쓴다. 그러면서 그곳에 어린 자신을 등장시키며 그 소녀에게 결코 속죄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속
죄이자 (자신을 향한) 징벌이다.
브리오니는 매번 같은 순간으로 돌아가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본다. 그녀는 59년 동안 그렇게 글을 써왔다.


그리고 두 가지 친절에 관하여


  진실은 이것이다. 로비와 세실리아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날 헤어졌으며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영화 속 브리오니가 말하듯이 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하지만 브리오니는 다시 의문에 빠진다.“연인들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할까? 냉혹한 사실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을 빼면 그런 결말이 가져올 장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521쪽) 

  브리오니의 마지막 원고가 이전과 다른 결말이 되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다른 미래를 선사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로비가 세실리아와 다시 만난다. 그들은 약속했던 해변의 저택에서 삶을 이어간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브리오니는 하나의 친절이었다고 말한다.“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다고. 그녀는 그녀 자신조차 죽고, 이후에 남겨질 이야기만을 생각했다. “내가 죽고, 마셜 부부가 죽고, 마침내 소설이 출판되면, 우리는 모두 내 창작품 안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브리오니는 (…) 공상 속
의 인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내 글이 소설이 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을 허구로 끌어다 썼는지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데,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까?>하고 묻는 독자들이 언제나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대답은 간단하다. 연인들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산다." 
(520쪽)


  이전의 원고들, 그것들이 그녀 자신을 향한 59년 동안의 편지였다면, 이제는 정말 소설이 쓰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또 하나의 친절이 있다. 원작 『속죄』는 브리오니의
소설이 세상에 나오는 걸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걱정하는 것은 소설이 출간되지 않는 경우처럼 보인다. 감독 조 라이트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 영화 속 늙은 브리오니는 소설 출간을 맞이하여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친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브리오니가 소설을 통하여 두 사람의 삶을 지속시켰고, 그것이 그
들을 향한 하나의 친절이었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또한 그녀에게 베푸는 친절이 될 수밖에 없다.


[끝]

글_ 김지섭




[영화 정보]

어톤먼트 <Atonement> (2007作) 드라마, 로맨스/영국/122min
감독 조 라이트
출연 키이라 나이틀리(세실리아 탤리스), 제임스 맥어보이(로비 터너), 시얼샤 로넌 (브라이오니 탤리스)


[원작 도서]

『속죄』(Atonement,2001作) /번역본 2003
작가 이언매큐먼
역자 한정아
펴낸곳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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